1985년 고등학교 입학 후 다음 해인 1986년 ,이과와 문과(현재 사용한 표현과 다르겠지만) 로 결정해야 할 시기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중학교때부터 꿈인 법조인,또는 기자가 되기 위해 법대를 가고 싶었고
주변의 선생님들도 제가 법대를 지망하리라 짐작을 하셨고, 제 성향에도 법대가 잘 맞는다고 생각을 해서 문과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과와 이과를 선택할 때 주저없이 문과를 선택해야 하는데
저에게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든든한 가장이셨던 부친께서 신부전으로 고인이 되셨고
법대를 가서 법조인이나 기자가 되는 건 어린 마음에도 공부이외에 "운"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법고시에 붙어야만 되는 일이므로 (당시에는 1년에 300명 수준으로 선발을 했죠)
부친없는 상황에서 법대를 선택하는 건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그래서 안정적인 직업을 고려하게 되었고 작은 집에 흉부외과 전공자인 삼촌이 계시기 때문에 의사라는 직업이 좋아보였습니다.
의사를 선택하자 그럼 이과를 가야지. 의료인이 의사, 한의사,치과의사 간호원(그 당시는 간호원)이였습니다.
의사와 한의사? 한의사가 있구나. 맞아. ~ 나 공부할때 지치지 말라고 한의원가서 한약도 처방받아서 복용했었지.
의사보다는 촌스러워 보이지만 내 동생 중이염도 이비인후과에서 1년 넘게 다니던 중이염도 한약 복용 2-3주로 귀에서 고름이 나오지 않았지..
그건 무얼까? 말린 약초를 달여서 먹었는데. 화학적으로 성분이 나오지도 않는데 어떻게 저런 작용이 나타날까..
이런 생각은 잠시 잠깐 해봤지만. 중학교에서 고등학생 수준에서
잠시 잠깐 일뿐 오래해본 생각은 아니였습니다.
어머님이 좋다고 해서 아버님이 좋다고 해서 복용했지 또 복용해서 몸이 달라졌다고 해서 당연하게 생각했지 그걸 신기하거나 관심있게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제 미래를 결정해야할 고등학교 1년 겨울 방학이 되니
저런 스쳐지나가던 생각들을 조각조각 모아서 선택에 활용해야 할 시기가 되더군요.
의사도 치과의사도 졸업후 면허를 취득하고 의원으로 개원해도 되는 부분은 마찬가지지만 한의사는 저 시기에는 "전문의제도"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과를 선택하게 되었고 1987년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응시를 합니다.
학력고사제도 중에서도 본인이 가고자 하는 대학에 직접 가서 응시를 하는 본고사 형태과 결합된 제도로 시험을 쳤고 경희대입학에 실패합니다.
대입에 실패한 건 충격이였습니다. 법대를 지망하지 않아 수월하게 한의대에 입학할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제가 지원할 때 한의대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기는 했었지만 본격적으로 많이 상승했었는지 8.95:1 정도의 경쟁율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예상 밖의 결과에 오기 아닌 오기가 발동해 대입합격자 발표가 끝난 직후인 1988년 1월에 입시학원에 등록하게 되어 그해 12월에 다시 응시를 하였으나
또 실패하게 되었고 후기대학인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응시하여
합격하게 됩니다.
이 때 경희대학교에서 대입고사를 치를 때 보았던 몇몇 학생을 다시 대전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를 때 마주치게 되었고 그 분들을 동문으로 입학해서 보게 됩니다.
수월하게 한의대에 입학하지 못했고 나름 불편한 시기를 보내면서 선택한 한의사란 직업이 ...
지금은?
한의사란 선택이 어린 생각에 선택한 결정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한 선택이란 걸 자부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한의사란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가끔 남편과 제 아이에게 하는 말이지만 정밀한 수술을 요하는 외과의 선생님들과 학문적으로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혈관잇기라던가 신경잇기 ,물론 생명의 촌각을 다투는 수술범위) 정밀한 현미경적 수술및 촌각을 다투는 수술이 아닌 이상은 ,저는 한의사가 치료해내는 영역이 많고 또한 인체의 생명력과 재건력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지 않는 치료원리를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의사인 것이 자랑스럽고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