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의학임상의.1

중의학 임상의.1

1995년 6년의 한의대 학부를 졸업하게 됩니다.
본과3년때부터 간간히 듣던 중의학.
중의학에 대한 호기심과 실제로 우리에게 알려진 대로 한국에서 한의사들이  액팅하고 있는 분야보다 더 많이 그리고 영역의 제한 없이 중의를 액팅하고 있는지
직접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동기들은 졸업 전부터 "대전대학교 한방병원" (현재 대흥동에 소재한) 에 인턴으로 지원을 할까. 아니면 유명한 한의원에 페이닥터로 취직을 할까. 아니면 다른 한방병원에 인턴 지원을 할까.. 로 진로를 고민 할때
저는 중의학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욕구에 이리저리 루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나라에 유학하고 싶으면 인터넷으로 정보를 쉽게 찾아낼 수 있지만 1995년에는 인터넷의 발달이 미미할 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과의 수교도 만 1년을 갓 넘긴 때였습니다.
말 그대로 "중공", 중국인민공화국의 약칭인 중공으로 인지하고 있던 죽의 장막 그자체였습니다.
비자받기도 어렵고 한국의 한의사를 받아줄 중의대학교를 찾기도 어려웠습니다.  

"북경침구골상학원"  "북경중의대학교"의 부속병원 및" 중의학연구소"의 부속병원 역활을 했던 " 침구골상학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성적과 건강검진 기록을 보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의 예과및 본과 6년간의 성적 증명서와 졸업증명서 그리고 한의사면허증및 건강검진 기록을 보냈습니다.
저는 b형 간염의 항체가 없습니다. 접종을 해도 항체형성이 안되는 것이죠.
건강검진상 항체가 없고 접종을 해도 항체형성이 안된다는 증명까지 첨부해서 다시 보냈습니다. 
어렵게 침구골상학원에서 임상의로 받아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족도 있었습니다. 수련의의 신분이 아닌(중국은 수련의도 국가에 일정기간 헌신? 해야합니다. 저 당시에 요) 
임상의 신분이니 주거비용및 임상학습에 대한 비용이 1개월에 400달러에서 임상과목이 많아질수록  600달러 까지 갈수 있다는 안내였습니다.
주거 비용은 개인이 마련해도 좋고 부속병원  윗층 병동 중 일정 부분이 다른 나라에서 임상의로 온 의사들에게 내주는 공간이 있으니
한달에 300달러의 주거비용으로 거주 가능하다는  내용이였습니다.

모친에게 상의하니 한국에서  익힐수 있는 건 다른 시기에도 할 수 있지만 어렵게 연결되었으니 다녀오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모친의 지원하에 우선  6개월을 생각하고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그게 1995년 2월말 의 일입니다. 면허증이 나오고 2주후에 저는 북경행 비행기를 타게 됩니다.

북경공항에서 저를 마중나온 침구골상학원의 행정관계자는 병동에 빈자리가 없으니 우선 학교측에서 호텔에 숙소를 마련했으니 2일만 호텔에서 머물고 병원으로 숙소를 옮기자고 했습니다.
저는 저 내용을 "영어"로 듣고 이해했습니다. 
한자와 한문은 어느 정도 기본 이상이였지만 중국어는 "안녕하세요"라는 중국어 이외에는 문외한이였습니다.
어찌나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던지....
 북경에 도착한 첫 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리고 무서운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2일후 병원의 행정실에 저의 여권을 내고 본인 대조및 서류확인을 하고 11층이던가? 부속병원의 맨 윗층의 임상의들 숙소에 침대를 배정받았습니다.

저는 수단에서 북경중의대에 유학을 온 여학생과 같은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아샤"라는 이름의 여학생은 학부생이였고 저는 이미 한의사이므로 어린 마음에 다른 나라 의사들과 같은 방을 배정해주지 라는 서운함이 있었는데 후에 알고보니 여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학부생과 같은 방에 배정을 해준듯 합니다.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오전시간/
점심시간/
오후2시부터 6시까지 오후시간

중의내과/ 중의부과(부인과) / 중의아과(소아과)/ 중의오관과(이비인후과) /침구과/ 도인안마(한국식 도수,수기)  /중의피부과/ 기공과
이런 각과로 임상의 일정을 소화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영어는 조금 하지만 중국어는 "안녕하세요"에 해당하는 중국어만 알고 간 상태라 맥진.설진. 기타 임상적인건 우선 필담을 해주시기로 하셨고. 그렇더라도 환자의 상태를  언어로 들어야 하기때문에 "영어"로 통역해 주는 중의사 한분,그리고 한국말로 통역해주는 조선족출신 중의사 한분,이렇게  두분이 도와주셨고  저 역시 중국에서 중국어를 못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조선족 중의사분에게 부탁해서  중국어과외를 중국인분에게 받았습니다.
임상각과를  수련및 임상에 부분 참여를 하면서 현재 중국에서도 유명한 "오학장=吳學章"이라는 분에게 중의내과를 임상지도를 받았는데요. 
후에 심양에서 일을 시작할 때 이런 저런 이야기중에 저의 북경 시간을 궁금해하는 중국분들에게 저 분에게 임상지도를 받았다고 했더니
현재 중국에서 상당히 덕망있는 중의사로 유명하신 노중의가 되셨다고 침구골상학원에 계시던 "우따이푸"가 맞냐고 재차 물으시더라구요
저의 임상기간과 오학장 ,우따이푸의 재직기간이 일치하는 걸  확인하고서 중국관계자들이 안심하는 눈치였습니다.
약. 1년이 안되는 중국의 임상기간 동안 외롭고 낯설고 힘들었지만
한국에서도 저희 모교 교수님들이 잘 가르쳐 주셨지만 중국에서도 좋은 분에게 지도 받았다는걸 새삼 중국인들에게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북경에 있던 기간 동안 한국인 한의사는 없었고.
일본,네덜란드 덴마크 영국 이런 나라의 의사들만 중의학의 장점에 매료되어 스스로 비용을 지불하며 임상의로써 중의학의 임상을 하나라도 놓치지않고
눈과 머리로 체험하려고 있었던 시절.
제가 얻은 성과는 중의학이 한국의 한의학보다 질환에 참여하는 범위가 상당히 넓고 그리고 그걸 꾸준히 데이터베이스로 축적을  하는 과정.
그리고 한국에서보다 과감한 침구기술 및 시술 , 중국에서 "국의"로 중의를 대하며 지원을 전폭적으로 하는 점.
그리고 중의사와 서의가(한국식으로 양의) 진료에 대한 파트를 협의하에 잘 배분하며 환자의 회복에  전혀 다른 두 의학의 장점을 최대한 지원한다는 점,
이런 부분이 한국의 한의학과 ,또한 한국의 의료현실과 다른 부분이라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한의학이 담당하는 좁은 영역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2015년 이 맞을 겁니다. "투유유"라는 이름의 여자 "중의사"가 한약제재로 노벨의학상을 따냈죠. 이 결과는 중국의 중화주의에 기름을 부어 넣었습니다. 자신들의 전통적인 중의학으로 게다가 현대적인 추출방법이 아닌 고전=古典에 근거한 방법으로 유효성분의 추출이 된 부분이 포인트였던 점이 중국인들에게 자부심을 더 해주었습니다.
개인적 소감으로  중국의 중의학에 대한 국가적 지원과 중의사들이 꾸준하게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해 온 과정이 노벨의학상을 취하게 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냥 부러웠습니다.한국의 한의사선생님들은  대부분 훌륭한 마인드를 갖고 있는 분들입니다.
묵묵히 광고나 마케팅에 관심없이 난치질환을 연구하고 있는 분들도 계시고
 서양의학에선 잘 치료가 되지 않는 부분도 몸의 원리를 바로잡아서 치료적
 결과를 내고 있고 , 일상 생활에서 불편한 질환을  몸의 생리 기전에 거스르지 않고  생리에 잘 순응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내는 치료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의료인으로써  제가 절감하는 부분은
 우리나라는 보건복지부에서  한의학의 뛰어난 부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알아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다른 유럽의 국가) 동양의학에 대한 이해도가  유럽의 국가보다 못한 느낌마저 받습니다.
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는  기본적인 마인드도 갖춰지지 않은 데다가 한의학의 장점 마저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체감되는 것이  1996년 부터 2018년 1월 ,현재까지 진료를 매일 하고 제가 느끼는 분위기입니다.